11.12.2016 노동당사
이어지는 우울한 날의 연속.
경비실에서 택배 왔다고 연락와서 가서 보니까 9일날 와있던 택배가 누락되고 누락되고..
심지어 11일날 갔는데도 누락되어서 뒤늦게 받은 음반들을 리핑하고 남은 피로좀 더 풀고 두시 즈음엔가 출발했던 것 같다.
어디로 갈지 한참이나 고민했는데 이번엔 북쪽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간 북쪽으로 라이딩 가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
군대가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로 타고 문산너머 위로 올라가면 있었던 내 부대.
실제로 더 오래 생활했던 곳은 GOP라 갈 수 없는 곳인데다 FEBA 철수한 이후에도 민통선 위 인지라 사실 갈 수 없다.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곳이 FEBA 철수 이후 파견나가는 곳이 있는데 그곳 하나.
아무튼 군대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이등병 시절 한참이나 고생했었는데, 그당시 내 보직은 K-4였다. 자대배치를 바로 GOP에서 받았었는데
화기중대에 K-4 같은 경우 분대단위로 찢어져 타 중대에 배속되어 활동하게 된다.
그래서 이등병 시절 3중대에 배속되어 지냈고, 이등병 시절동안 내가 아는 선임은 다섯명 채 되지 않았다.
나랑 함께 생활하던 세명의 선임과 그리고 옆 중대에 배속되어 생활하는 다른 K-4 분대의 두명의 선임. 그 두명의 선임은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건 FEBA 철수 이후에 봤을 정도다.
여기까진 아무렇지 않다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중대장의 정책은 이렇게 타중대 배속되는 특성을 아예 유배지마냥 사용하였고
내가 아는 선임 세명 중 한명은 말년 병장, 나머지 둘은 상병 말이었는데 자대전입 이후 며칠 되지 않아 병장으로 진급했었다.
물론 이 셋 다 문제있는 사람이고 전적이 화려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이등병으로 들어간 이전에도 수많은 이등병이 그곳을 못버티고 나갔었다.
나는 운 좋게 일병 달 때 즈음 81 mm FDC로 착출되어 중대로 돌아가긴 했는데..
거기서 지낸 기억이 정말 안좋다. 덕분에 군생활 내내.. 아니 지금까지도 사람한테 잘 화내질 못하겠다.
이런 기억때문에 북쪽으로 가기가 너무 싫었다. 그나마 가본 곳이라곤 일산정도..
일때문에 포천까지는 올라가 봤지만 파주는 정말 가기 싫었다.
이날 아침 라이딩을 어디론가 떠날까 말까 하다가.. 이렇게 날씨가 기이하게 좋은 날은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기울었을 때,
집에 있는데 스트레스 쌓이는 일들이 터지다 보니 나가자고 마음먹었다. 할 일들을 산더미마냥 쌓아둔 채.
처음에 떠오른 곳은 평화의 댐이었다.
운 나쁘게도 이번 예비군 훈련을 받은 곳이 화천이었다. 화천 가는 버스 안에서 경치는 참 좋았다. 너무 멀어서 뭐같았지만...
조기 퇴소 대상자여서 (동사무소에서 향방작계를 받았었다.) 조기퇴소 했는데 군대답게 가장 가까운 버스터미널 까지만 태워다 줬고, 거기서 강변역까지 간 다음에 집까지 오니까 4시간이 지나더라........ 아무튼 그렇게 오고가는길에 핸드폰 안하고 그냥 경치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오두바이타고 한번쯤 와보고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경치가 좋았다.
그래서 평화의 댐을 목표로 거리를 찍어봤는데 200 km 넘는 거리였다. 왕복 400 km면 진짜 빡씨게 달리기만 해야하는 거리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곳 어디 있을까 하다 문득 생각난 철원 노동당사.
동호회에서 사람들이 한번 놀러갔던 곳인데 노동당사 사진이 정말 특이한데다 이름이 궁금했었다.
가서 알아보자 생각하고 그냥 노동당사 네비찍고 출발했다.
원래 여행할땐 루트 대충 잡고 루트스터디 한다음에 출발하는데 내 상태가 그렇게 신경써서 갈 상태가 아니었다.
너무 답답하고 복잡한데다 짜증나서 그냥.. 한적한 곳을 평화롭게 달려가고 싶은 충동만 가득 들었다.
출발 직후 서울과 경기권 벗어나는데 교통량이 꽤 있었지만.. 그냥 참고 나왔다. 일산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차가 많이 줄었는데
파주에 진입하니 이동네 사람들 80 km/h 제한속도 구역에서 최저속도가 80 km/h 였다.
그냥 생각없이 길을 쭉쭉 나아가고 있었다. 루트스터디를 하지 않아서 중간에 어디 찍고 갈지도 모르고, 그냥 네비에서 안내하는대로만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복잡한 생각들좀 정리하고 있었다.
점점 도시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한적한 도로에서 유유하게 주행하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가지.. 이상한게 길들이 하나둘씩 익숙한 길이었다. 자주 오가던 길은 아니지만 한번쯤 지나갔다는 생각이 드는 길들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여기서 익숙한 느낌이라 해봐야 군대랑 연관된 것일텐데..
난 아직 그 기억과 대면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이번 라이딩에 북쪽으로 향하는 것도 군대랑은 좀 빗겨나가고 싶었을 뿐이다.
단지.. 군대 때문에 내 라이딩 스펙트럼 중 북쪽 전체.. 그러니까 1/4를 날려버리기 아까워서 북쪽으로 향한거지, 군대에 있었던 기억과 대면하고 싶었던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길은 점점 낯익은 길로 지나가고 있었고, 표지판에 보이는 지명들이 낯익었다.
결국 도착한 곳은.. 파견근무로 있었던 곳.
다리 통행관련 근무를 서던 곳인데, 여기 다리를 통해 임진강을 넘어가는 부분이 민간인 통제선이라 여기 출입관리를 FEBA 철수 이후 파견와서 했었다.
통일대교에서 초평도를 지나 위에 있는 다리인데 군사지역 중 하나라 다리 이름을 대놓고 적기가 그렇다..
우상단에 살짝 보이는 막사에서 몇달간 생활 했었다.
배아파서 화장실 쓰려고 저쪽으로 진입해서 화장실 쓰기 전 거기에 근무하던 간부랑 수다 떠는데
군대 전역한지 몇년 동안 변한게 참 많았다.
내 직속 소대장은 중대장을 거쳐 전역해서 만났으니까 전역한 것을 알았다.
장교급이야 물어봐야 당연히 모를것 같아 안물어보고 부사관급들 물어보는데
친하게 지냈던 중사님이 우리 중대 행정보급관님이 되어있는 등 인사이동이 참 많았더라.. 그간 인사이동 없는게 이상하겠지만
생활하는것도 물어보니 내가 있었을 때랑 많이 달랐다.
동생한테 들은 이야기로 요즘 군대 지원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훈련소에서 TO가 없어 빠꾸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진다고 한다.
뭐 아무리 좋아봐야 군대겠지만.. 아직 우리나라 군대는 한참이나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겪었던 그런 트라우마를 다른 사람이 안 겪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설렁설렁 준비해서 다시 라이딩길에 오르고 쭉 이어나갔다.
라이딩하면서 중간중간 사진을 찍을까 고민한 포인트들이 꽤 있었지만..
사진으로 남겨놓고 싶진 않아 그냥 지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내 머릿속에서 잊혀질 순간들을 일부러 박제하지 않은 것이다.
SNS나 블로그 그리고 촬영장비들이 발달하면서 여행의 의미가 많이 변색된 것 같다.
누군가 정말 아름다운 사진을 건지는 여행을 보면 사진 보면서 부러워 하긴 하지만..
나의 경우 여행은 그냥 내가 쉬고 즐기러 가는 것 뿐이다.
사진으로 안찍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많지만 사진 찍는다고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어디 갔다오면 사진 안찍고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아침에 리핑한 음반들을 감상하며 올라가는데 약 6,000 rpm 가량 되면 (데이스타에 rpm 계기판이 없다.)
앞쪽에서 무슨 쇠 긁는듯한 소리가 너무 신경쓰여서 음악소리도 그리 크게 내지도 못하고
반쯤 불안한 마음으로 풍경보며 여행을 갔던 것 같다.
오두바이를 보면 자동차만큼 완벽하지 못한 녀석이긴 하다.
자동차는 정말 신경안쓰고 타고 다니는 이동수단이지만
오두바이는 애정으로 굴러가는 녀석이라고 생각된다.
자동차는 혼자 설 수 있지만, 오두바이는 내가 타고있어야 그제서야 바퀴로만 설 수 있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니까.
그래서.. 내가 오두바이를 좋아하는걸지도 모른다. 관심이 필요하고, 손이 많이 타야하는 특성때문에.
나도 비슷한 놈이니까 그러는거겠지.
암튼 길을 가다가다 갑자기 좋은 풍경이 생겨서 이건 찍어야지 했는데 도착했다.
거의 무너져 가는 노동당사의 건물을 보는 기분이 참 오묘했다.
게다가 노동당사 라는 이름도 참 이상했고.
이상하게 오두바이 타는동안은 춥지 않았는데 어딘가 멈춰있으면 정말 추웠다.
주변에 있는 매점에서 커피한잔 마시려는데 따뜻한 커피가 없어서 그냥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주변을 돌아보고, 안내판에 소개된 노동당사의 글을 읽으면서 그 텍스트를 적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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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노동당사. 등록문화제 제22호. 이 건물은 1945.8.15 해방 후 북한이 공산독재 정권강화와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하고 6.25전쟁 전까지 사용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라는 구실로 1개 리당 쌀 200가마씩 착취 하였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하는 한편, 건물의 내부 작업 때는 비밀 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멘트와 벽돌 조적만으로 지어진 무철근 3층 건물로써 당시 이건물 일대는 인구 3만명이 살았던 철원읍 시가지였으나 6.25전란으로 모두 파괴되었고 유일하게 노동당사 건물만 남아 있다. 여기저기 포탄 자국과 앙상한 빼대만 남아 있는 노동당사는 6.25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며, 철원이 얼마나 치열한 격전지였는지 짐작이 간다. 공산치하 5년 (1945~1950)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수탈과 애국인사를 체포하였고 고문과 학살 등 소름끼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으며, 이곳에 한 번 끌려 들어가면 시체가 되거나 반송장이 되어 나올 만큼 무자비한 살육을 저지른 곳이다. 이 건물 뒤 방공호에서는 많은 인골과 함께 만행에 사용된 수많은 실탄과 철사줄 등이 발견되었다. 2002.5.27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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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누리는 평화는 수많은 피의 댓가라 생각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그곳을 즐기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섰다.
사실 이미 시간이 꽤 늦었다. 해가 지기까지 몇시간 남지 않았고, 오는 길 내내 큰 길이 아닌 가로등 몇 없는 길들이라 걱정되기도 했고..
마음이나 생각이나 정리는 덜되었지만 이걸 다 정리하려면 하루로는 부족한걸 알고 있었다.
내 현재 GPS 로깅을 볼 수 있는 지인들이 장난치기 시작했다.
철원에 아무 생각 없이 갔는데.. 비주얼상 위치가 어마어마했다.
수령의 품으로 가는거냐며 다들 장난쳤는데 지금봐도 웃긴 스샷이다. 난 노동당사가 철원에 있는것만 알고 간건데 저렇게 경계쪽에 있는줄은 몰랐다. 어쩐지 가는 내내 군부대들 근처로 지나가더라..
그렇게 백마고지 근처 철원 노동당사에서 다시 집으로 출발하여 중간에 한번 쉬고 발산역까지 복귀했다.
일산 근처에서 길이 막히다 보니 시골길로 안내했었는데
아무것도 안보이는 길에 반댓편에 차가 한대 오고 있었고, 나는 좌회전 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 차 지나가면 좌회전 하려고 좌회전 방향지시등을 켜고 멈춰있었다.
반댓편 차는 서서히 오더니.. 갑자기 내 앞에서 중앙선을 넘는게 아닌가.
!!
어.. 시발..
그러더니 헤드라이트의 두 불이 내 양옆을 지나갔..
자전거였다. 3대가 대열주행하는 자전거였는데 뒤에 자전거 한대는 불이 안보였었나보다.
그래도 개새끼들아 차선은 지켜서와야지.. 주마등 감상했..
일산에서 서울 오기까지 길이 정말 막혔는데 발산역 부근에 가다보니 엔진경고가 떳고.. 그래서 발산역 주변 카페로 긴급하게 멈췄다.
무슨 경고일지 열람하려고 이리저리 찾아보는데 인터넷에 정보가 없었다.
다시 시동을 켜보니 경고가 사라졌는데.. 왜 경고가 뜬걸까.. 하면서 다시 강서구청 사거리 탐앤탐스로 향했고..
지인들 만날까 고민하다 피곤해서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
그렇게 그냥 혼자서 즐겁게 다녀온 여행이 되었다.
어느덧 동호회 활동을 지속하다 보니 이야기만 하면 수두룩하게 다녀 올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러다 보니 나 혼자 달리는 시간이 없었던 것 같다.
그냥 혼자 다녀온 여행 또한 재미있었다. 되게 심심할줄 알았는데 복잡한 생각과 마음 덕분에 심심할 일 없었다.